빛과 실 리뷰 한강의 목소리로 꿰맨 고요와 상처의 시간

2025. 5. 19. 23:48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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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한강, 그녀의 글은 언제나 우리를 잠잠한 폭풍 속으로 데려간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이후, 그녀는 세계 문학계에서 고유의 감성과 침묵의 언어로 주목받아 왔다. 이번에 출간된 빛과 실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그녀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낸 말들로 엮은 독특한 산문집이다. 시, 산문, 강연문, 일기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이 한 권에 담겨 있어 한강 작가의 사유 세계를 집요하게 따라가게 만든다. 이 책은 독자가 ‘한강이라는 세계’를 보다 밀도 높게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다.

 

한강 작가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실, 빛과 실

빛과 실은 단순한 산문집이 아니다. 이 책은 한강이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발표한 수상 연설을 중심으로,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미발표 시와 일기, 산문들을 포함한 총체적인 기록물이다. 이 글들은 그녀가 머물렀던 ‘북향의 방’과 정원에서 써 내려간 시간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시처럼 응축된 문장, 문장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침묵, 일기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자연의 디테일은 그 자체로 문학이다.

특히 일기의 존재는 뜻밖의 선물처럼 느껴진다. 날씨와 나무, 고양이, 그리고 글쓰기의 고통과 기쁨이 조용히 뒤섞여 있는 일기는 한강의 감각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언어는 무겁거나 날카롭지 않다. 오히려 부드럽고 천천히 독자의 마음을 적신다. 한 단어, 한 문장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빛과 실이 보여주는 문학적 감각과 주제 의식

한강의 글에는 일관된 주제의식이 있다. 폭력과 상처,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의지. 빛과 실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수상 연설문에서는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고통의 순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감내해왔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녀는 ‘고통’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단어 사이에서 울리는 침묵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이 책은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동시에 시대를 관통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세계 속에서 글쓰기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예술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은 독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특히 자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고요하지만 날카롭다. 봄날의 나뭇가지, 창밖을 스치는 고양이, 미세한 바람 그 모든 것이 한강에게는 쓰일 ‘대상’이자 ‘존재의 증거’다.

 

기존 작품과의 차이점, 그리고 빛과 실만의 가치

이전 작품들과 달리 빛과 실은 허구(fiction)가 아닌 비허구(non-fiction)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감정의 밀도나 서정성은 이전의 소설보다 더 깊다. 『소년이 온다』가 국가폭력과 집단기억을 다루었다면, 빛과 실은 내면의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감정을 조명한다. 『흰』이 상실의 언어를 조용히 흘려보냈다면, 이 책은 상실 이후의 '기록된 사유'다.

장점은 바로 이 감정의 진실성에 있다. 작가는 자기를 포장하지 않는다. 일기 속에 드러나는 그녀의 우울, 무기력,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희망은 모두 솔직하고 자연스럽다. 단점이라면, 문학적 서사나 극적인 구조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낯설고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강’이라는 작가를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겐, 이보다 더 친밀하고 정직한 책은 없을 것이다.

 

결론: 침묵 사이에 빛나는 실, 문학의 존재 이유

빛과 실은 작가의 육성, 혹은 삶의 흔적이 생생히 담긴 기록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한강이라는 사람과 아주 조용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소설 속에서 철저히 인물 뒤에 숨었던 작가가, 이번에는 자신의 언어로 자신을 말한다. 그 고백은 슬프고 아름답다. 결국 『빛과 실』은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라고.

한강의 오랜 팬으로서, 이 책은 단순한 팬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작가의 고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독자로서의 특권이며, 작가가 살아온 시간을 함께 통과하는 일이기도 하다. ‘빛’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늘 ‘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실을 잡고 오늘도 문학이라는 빛에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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