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류에 휩쓸리듯, 삶을 마주하다 정대건 작가 급류 리뷰

2025. 5. 24. 09:09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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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정대건 작가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 『GV 빌런 고태경』을 통해서였다면, 급류는 그의 세계관이 얼마나 깊고 넓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이미 시나리오 작가로도 왕성히 활동 중인 그는 매 작품마다 새로운 주제의식과 문체적 실험으로 독자들에게 놀라움을 안긴다. 이번 급류는 그가 인간 내면의 갈등과 상처, 그리고 ‘흐름’이라는 은유를 통해 삶을 섬세하게 포착해 낸 작품이다. 정대건 작가의 진화한 세계관을 확인하고 싶다면,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책 정보와 집필 의도

정대건 작가의 장편소설 급류는 2023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작품으로, 청춘의 혼란, 회피, 성장이라는 테마를 중심에 두고 있다. 주인공 도담은 일종의 ‘사라짐’을 선택한 인물이다.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어느 날 무작정 사라졌고, 해솔이라는 여성과 함께 낯선 지방 도시로 흘러들어 간다. 이곳에서 도담은 또 다른 인물들과 얽히며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듯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격류 속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작가는 ‘삶의 흐름을 피해 도망쳤다고 해서, 삶 자체를 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둔다. 그 흐름은 사회적 관계일 수도, 죄책감일 수도, 혹은 자신이 만든 굴레일 수도 있다. 급류는 정대건 작가가 지금까지 다뤄온 청춘의 다양한 형태 중 가장 정제된 형태라 볼 수 있다.

 

다른 장편소설과의 차이점

정대건의 전작들은 다소 팽팽한 긴장감이나 감정의 격렬한 충돌이 중심을 이루었다. 『GV 빌런 고태경』은 영화계를 배경으로 캐릭터들의 갈등을 유쾌하면서도 신랄하게 그려냈고, 『주말엔 숲으로』는 ‘쉼’과 ‘자연’이라는 주제를 위트있게 풀어낸 단편들이었다.

하지만 급류는 다르다. 이 작품은 침묵과 정적, 그리고 자전적인 감정들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사건보다는 감정의 결들이 중심이 되며, 독자들은 마치 ‘강물 속에 잠겨 서서히 떠오르는 기억’을 경험하듯 느리지만 깊은 몰입감을 얻게 된다. 특히 장면 전환이 생략되거나 여백으로 처리된 부분은 시나리오 작가 출신으로서의 강점을 살리되, 문학적 실험을 병행한 형태라 신선하다.

또한 급류는 지역성과 세대 간 대화의 부재를 아주 현실적으로 풀어낸다. 소외된 도시, 생경한 방언, 불편한 감정의 언어들 속에서 도담과 해솔, 그리고 그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아무리 멀리 흘러가도, 우리는 결국 서로의 말에 닿고 싶어 한다는 것.

 

책을 읽은 소감

개인적으로 급류는 정대건 작가의 가장 성숙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속도감 있는 전개나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에겐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 생각하게 만드는 깊이가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도담과 해솔의 거리감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도망친 듯 보이지만, 실상은 각자의 급류 속을 유영하는 중이다. 서로를 바라보지만 온전히 닿지 못하는 그 감정은 절제된 문장과 공백을 통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흐름을 거스르는 자’를 그리지 않는다. 대신 ‘흐름에 자신을 맡긴 채, 방향을 찾는 이들’을 조용히 응시한다.

또한 읽는 내내 강물이라는 은유가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다. 삶은 종종 예고 없이 방향을 바꾸는 급류처럼 우리를 휘몰아친다. 그 급류 앞에서 어떻게 몸을 맡길 것인가, 혹은 어디까지 저항할 것인가. 이 질문은 독자 개인의 삶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삶의 흐름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그것이 정대건 작가의 소설이 가지는 힘이라 생각한다.

 

결론

급류는 단순한 청춘 소설도, 관계 소설도 아니다. 이 작품은 ‘흐름’이라는 거대한 은유를 빌려 현대인의 고독과 회피, 그리고 고요한 저항을 섬세하게 묘사한 문학적 성과다. 정대건 작가가 이제껏 쌓아온 작가적 정체성은 이 작품을 통해 한층 더 무르익었다고 확신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마음 한켠이 묵직해진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그 공백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음을 작가는 조용히 보여준다. 급류는 모든 정대건 팬들에게, 그리고 삶의 갈래에서 길을 잃은 누군가에게 건네는 깊은 위로의 손짓이다. 당신이 지금 어느 지점에 있든, 이 책은 흘러가는 삶 속에서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따뜻한 언덕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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